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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칼럼] 소통과 청백리는 순천도호부 정서다

기자명 : 오양심 입력시간 : 2017-07-10 (월)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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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시인>

 

역사적으로 볼 때 청백리의 고장은 순천도호부였다. 고려시대 최석 부사가 되 돌려보낸 말 아홉 필의 유래를 비롯해 발포만호 이순신의 오동나무사건은 ‘청백리고장’을 상징하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가끔 공직자들에게 “청백리를 아시는지요?”하고 묻는 지역민들도 있다. 청백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사전에서 풀이한 것은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자 실시한 조선시대 표창제도였다고 한다.


청백리정신을 대표하는 수많은 인물가운데서 최석 부사의 팔마정신과 발포만호 이순신의 오동나무사건은 순천도호부청백리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최석 승평(조선시대는 순천부사)가 1281년 12월 비서랑으로 영전해 임지를 옮기게 되자 당시 관례에 따라 이 고을 사람들이 말 여덟 마리를 바쳤다.


그러나 최 부사는 순천부에 근무할 때 자신의 소유인 암말이 낳은 새끼말까지 더해서 아홉 마리를 순천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 이후부터 말을 바치는 獻馬의 폐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특히 이순신의 발포만호당시, 오동나무 사건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의 전쟁사 중에서 청백리정신을 바로세운 일화로 관료들의 교훈이 되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36세 되던 해였다. 그는 선조 13년(1580) 지금의 전라도 고흥 발포의 수군만호로 수군과는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었다.
 
이때 그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 박이 군관을 보내 관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통보했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저 관사 뜰에 서있는 오동나무는 나 개인의 물건이 아니라 나라의 물건이오. 더구나 저 같이 오래된 나무를 하루아침에 베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하면서 전라좌수사의 군관을 꾸짖어 돌려보냈었다. 얼마 후 그는 이 일로 인해 결국 파직됐다.
 
당시의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이순신의 명령불복종은 파직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상사의 명을 거절했었다. 비록 상사의 명이라 할지라도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았던 발포만호였다. 진정한 청백리는 청렴결백한 올곧은 정신으로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파직교훈을 남겼다. 
 
청렴의 가치는 사회가 다원화되고 그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도덕불감증의 그늘 아래 점차 퇴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최근 국민들은 고위공직자들의 온갖 뇌물과 비리에 대한 청문회를 접하고 있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공직자들이 지녀야 할 청렴과 덕목은 말할 나위도 없이 중요하다. 청렴의 가치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진정한 청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청렴을 바탕으로 국민과 나라를 위한 행적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시 순천도호부 관할행정구역의 통칭 오관오포는 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의 다섯 군현(郡縣)과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 사도진, 방답진의 다섯 진포(鎭浦)였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주로 순천도호부의 소통문화와 생활문화가 많이 쓰여 있다. 예를 들자면, 그는 순천도호부의 생활전선에서 그 시대의 소통문화와 청백리생활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그랬다. 이순신이 술을 마신 이유, 놀이를 한 이유, 노래를 부른 이유도 서민과 다를 게 없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맺힌 분노와 한(恨), 스트레스를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명절과 기념일을 기리고, 부하들의 생일과 송별연을 위해서였다. 평범한 우리, 혹은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격(格)을 보여주었다. 

 

술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1598년 11월 8일 일기다. 9월 말부터 10월 초에 이르러 순천 왜교성 전투가 끝난 뒤 군대를 휴식시키며 정비하고 있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머물던 순천 봉쇄작전을 시작하기 전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은 8월 3일 삼도통제사 임명장을 받고 수군 재건의 길을 나섰었다.  8월 6일, 피난을 떠나는 백성들이 이순신을 만났었다. 백성들은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는 살길이 생겼습니다”라며 기뻐했었다. 8월 9일 이순신이 낙안을 지나갈 때 길가에 동네 노인 등이 줄을 서 다투어 환영하고 위로하며 음식과 음료수가 든 항아리를 바쳤었다. 받지 않으면 울며불며 떼를 썼었다.


이처럼 순천도호부의 소통문화와 청백리정신은 역사적으로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최석 부사와 이충무공의 얼을 계승해서인지, 지역민들의 소통문화와 청백리정신은 생활문화로 정착됐었다. 아니 지역정서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가 정유년이다. 당시의 순천도호부에 속했던 순천시를 비롯한 여수시와 광양시 그리고 고흥군, 보성군 등 5관5포의 관청들이 그 얼을 되살리는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매우 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통문화와 청백리정신을 기리는 지역정서와 함께 역사문화역점 사업을 펼쳤으면 더욱 좋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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